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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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노수석/1996년 3월 29일

5. 1996년 3월 29일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3. 28. 21:44

1996년 3월 29일

노수석 열사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서총련 결의대회’ 중 사망

 

■ 1,500여명의 학생들이 함께한 ‘연세인 결의대회’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연세대 학생 1,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등록금 동결과 교육재정 확보, 대선자금 공개를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집회 뒤 본관건물을 항의 방문해 총장실, 기획실장실, 교무처장실의 집기를 모두 들어내고 일방적 고지서 발송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학생들은 “앞으로 또 다른 면담과정을 통해 등록금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자”고 요구했다.

등록금 동결과 교육재정 확보, 대선자금 공개를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작전’이 펼쳐진 종묘

연세대생들은 본관 앞 항의 집회를 마친 뒤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결의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종묘공원으로 이동했다. 교육재정확보와 대선자금 공개 투쟁 방침을 이미 천명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은 27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총궐기 투쟁’을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했고 이날 집회는 서총련 차원의 결의대회였다.

학교별로 사전집회를 마친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오후 5시 30분쯤 서울 종로2가 종묘공원 일대에 집결해 “김영삼의 ‘92년 대선자금 공개하라”, “부패정치 청산하자”, “교육재정 확보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곧바로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며 1차 진압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동대문 방향으로 쫓겨갔고 경찰의 계속된 추격으로 전체 대오가 을지로 방향으로 밀려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약 1/3 정도의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상당수 학생들이 검거됐다. 완전히 평화적인 집회였음에도 경찰은 이전의 해산 위주의 작전과 달리 종로3가 → 동대문 → 을지로로 쫓기는 학생 대열을 맹추격하며 강경한 진압작전에 나선 것이다.    


경찰에 쫓긴 학생들이 동대문을 돌아 을지로 6가에서 5가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을 때 잠복 중이던 기동 타격대(백골단)와 전투경찰이 시위 대열을 다시 급습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 대부분은 을지로 일대 골목으로 흩어졌으며, 그 중 극소수만 충무로를 거쳐 동국대 교정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경찰은 56개 중대 6,000여명이 출동해 ‘토끼몰이식 진압 작전’을 구사했으며 지도부는 직접 CCTV를 통해 학생들의 움직임을 하나 하나 파악해 백골단 등에게 알려주며 진압을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종묘에서 전체 대열이 해산돼 동국대 쪽으로 쫓겨가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을지로 6가 부근의 백골단은 과잉 진압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대로는 공사 중인데다 퇴근 차량으로 가득 차 있어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학생들은 갑작스런 백골단의 출현에 놀라 골목길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골단과 전경들은 대오를 잃고 을지로 골목길로 쫓겨가 가게에 숨어있거나 골목에서 지쳐 쉬고 있던 학생들을 폭행한 뒤 연행하는 등 잔인하게 진압했다. 


■ 노수석 열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노수석 열사는 법과대학 동료들과 함께 학내 집회에 참여한 후 집결지인 종묘 공원으로 이동했다. 시위 대열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고 전투 경찰들이 진압을 시작하자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을지로 일대로 쫓겨갔다. 그 과정에서 법학과 깃발을 들고 뛰던 남기돈(연세대 법학과 1학년)에게 “아까 맞았어, 아까 맞았어”라고 2~3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노수석 열사는 을지로6가 입구 지점에서 임이택(연세대 법학과 1학년)에게 “나 쥐났어”라고 해 노수석 열사를 부축해 대열을 따라갔다.  

그러던 중 을지로 6가에서 오장동 로터리로 가는 길목에서 노수석 열사가 “더 이상 못 가겠다. 가게 같은데 들어가자”고 하여 인쇄소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경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임이택은 천지호텔 앞 주차장 입구에서 연행됐다.

1996년 4월 1일 연세춘추

열사는 골목 안의 대현문화사에서 발견됐다. 먼저 대현문화사에 뛰어 들어간 김건극(한양대 3학년)과 심은선(한양대 1학년)이 인쇄기 뒤편에 숨고, 이어 노수석 열사가 들어갔다. 뒤이어 정의진(한양대 경영학과 2학년)과 차동호(한양대 경영학과 1학년)가 따라 들어왔다. 

밖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나 김건극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노수석 열사 옆을 지나가다 열사의 다리를 건드렸고 이때 노수석 열사는 ‘아악’하는 비명을 질렀다. 전경들에 쫓겨 대현문화사로 들어가려던 하민성(연세대 사회학과 2학년)이 전경에게 붙잡혔고, 인쇄소 주인 최종두씨가 항의하며 전투경찰을 인쇄소 밖으로 밀어냈다. 상황이 잠시 잠잠해지자 인쇄소 안의 학생들은 노수석 열사의 상태가 이상함을 발견하고 노수석 열사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전경들이 대현문화사로 다시 들어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연행과정에서 심은선이 노수석 열사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렸으나, 전투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학생들이 모두 끌려나간 뒤 인쇄소 여주인 조미선씨가 기계 뒷편에 앉아있던 노수석 열사를 발견하고는 가게 밖으로 나가 간부급으로 보이는 경찰에게 구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또다시 이를 묵살했다. 결국 조미선씨가 밖으로 나가, 지나가던 학생 김보선(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등 2명에게 도움 요청했고 학생들과 골목 주민들이 노수석 열사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인쇄소 주인 최종두씨가 119에 신고했고 오후 6시 47분쯤 119 구급차가 도착해 노수석 열사를 국립의료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결국 숨졌다.

조덕연 국립의료원장은 “6시 55분 도착한 직후 초진 결과 동공이 확대되고 호흡 및 심장박동이 멈춰있었다”면서 “오후 7시 35분까지 심장마사지와 전기 충격술 등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사망으로 최종확인됐다”고 밝혔다. 

1996년 4월 8일 한국대학신문

 

■ 열사의 시신이 ‘국립의료원’에서 모셔짐

곳곳에 흩어져 있다가 명동성당으로 집결한 학생들에게 노수석 열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학생들은 노수석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국립의료원’에 속속 모여들었다. 

학생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곧바로 ‘고 노수석 군 살인규명 및 사태해결을 위한 임시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사인 규명과 증인 확보 등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옮겨지는 열사의 시신과 오열하는 유가족들

경찰측과 대책위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시체 검안 작업이 진행되었다. 신체부위 여러 곳에서 상처가 발견되었으나 직접적인 사인으로 단정지을 만한 외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과 대책위 양쪽 모두  “확실하고 공정한 부검 때까지는 명확한 사인을 알 수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오후 11시쯤 ‘고 노수석 군 사인규명 및 사태 해결을 위한 임시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은 이덕우 변호사와 국립의료원 황정연 응급실장이 공동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덕우 변호사는 “가슴에 가로 5cm, 세로 5cm, 두께 0.5cm의 멍과 명치 위에 가로 0.5cm, 세로 2cm의 멍이 있으며 오른쪽 손가락 4개와 왼쪽 무릎에 넘어질 때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찰과상이 있다”고 밝혔다.  

법대 학생들 일부가 국립의료원 안으로 들어간 뒤 병원은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됐다. 동국대에 모여 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대학생 100명이 경찰의 시신탈취에 대비, 철야농성을 결의하고 병원 밖을 지켰다. 

국립의료원에서 대치중인 학생들과 전경들

연세대 총학생회는 시신을 모교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학교 당국에 연락을 취했다.  뒤늦게 김석득 부총장이 병원을 찾았지만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송자 총장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문헌: <노수석 백서 -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2005,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