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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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노수석/1996년 3월 29일

3. 95년 말부터 96년 초까지 정치적 배경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3. 28. 18:35

노수석 열사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1996년 3월 29일 집회의 요구사항은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였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요구사항이 1996년 봄, 개강과 함께 전체 학생운동 진영의 핵심 투쟁 사안이 되었는지를 정리해본다. 


■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는 1995년 하반기 정국을 달구었던 5․18 학살책임자 처벌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5․18 책임자 사법 처리 공소시효 만료가 다가오자 이에 대한 법리논쟁이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게다가 1995년 7월 18일 검찰에서 5․18 피고소, 고발인 58명에 대한 '공소권 없음' 결정이 발표되자 학살자 처벌에 대한 온 국민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7월 31일 고려대 교수 131명의 '5․18 특별법 제정 촉구 성명' 발표를 시작으로, 8월 25일 78개 대학교수 3,560명의 '5․18 특별법 입법 청원'이 이어졌고, 한총련은 9월 29~30일에 거쳐 '5․18 특별법 제정 촉구 동맹 휴업' 등을 진행하였다. 10월 26일에는 학생․노동․농민․여성․재야․법조․종교계 등 279개 단체가 모여 '5․18 범국민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10월 27일 중국을 방문중인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노 씨가 한 의원을 통해 김영삼 후보에게 수 천 억 원을 제공했다는 유력한 정보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 대표위원 김윤환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민자당에 지원한 자금이 있다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입을 열어야 한다"며 "노씨가 얼마를 줬는지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당이 자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밝혔으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 대선자금을 공개할 의지가 없음을 천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24일에 '5·18 특별법 연내 제정 결정'을 발표한다. 이는 1980년 이후 학살 책임자의 사법처리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국민과 민주화 투쟁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는 김영삼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일거에 훼손시킬 수 있을만큼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대선자금 문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고, 상대적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5․18 문제에 대한 사법처리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결국 12월 5일 발표된 노태우 전 대통령 부정축재 사건 수사 결과 발표에서 대검찰청 중수부장 안강민은 노태우의 전체 비자금 조성 규모가 4,189억원이나, 이 비자금이 1992년 대선 지원금으로 유입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에 대한 의혹이 계속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집권당과 대통령 스스로 이를 밝힐 의지가 없음이 드러나자 대대적인 집회와 시위를 통한 범국민적 저항이 고조되었고, 이같은 저항은 이듬해 봄까지 지속되었다.


1995년 11월 25일 한겨레


■ 교육재정 확보  

몇 년 동안 계속된 등록금 분규는 특정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사립대의 경우 등록금 인상률은 1991년 이후 연평균 15%를 기록하면서 6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인상되었다. 이것은 대학재정 자립도의 열악함에서 오는 구조적인 문제였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가진 곳은 오직 국가․교육부밖에 없었다. 따라서 1992년 각 대선 후보들은 스스로 ‘교육 대통령’임을 자임하며 ‘교육재정 5% 확보’라는 공약을 제시했다.

1996년 겨울, 전국의 대부분의 대학 등록금이 대거 인상되었다. 

1996년 1월 26일 한겨레


게다가 그해, '사립대학 등록금 인상 담합의혹'이 제기되었는데, 1996년 1월 20일 한겨레신문에 의하면,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연세, 고려, 서강, 한양, 이화 등 주요사립대학의 신입생 입학금 인상률이 3년간 똑같고, 특히 이중 고려대와 연세대는 같은 기간동안 등록금 인상률도 똑같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학생운동진영은 대학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학부모들의 등록금 부담을 낮추기 위한 투쟁은 정부를 대상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며 함께 외쳤던 구호는 '교육재정 5% 확보 공약 이행', '국가 교육재정 확충', '불법 대선자금 환수를 통한 교육재정 충당'이었다.



참고문헌: <노수석 백서 -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2005,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