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프레시안] 백남기 사건, 20년 전 故 노수석 때와 판박이 본문

추모사업회 소개/언론보도

[프레시안] 백남기 사건, 20년 전 故 노수석 때와 판박이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10. 10. 12:07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는 지난 9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쓰러지신 백남기 농민의 치료비를 모금했던 바 있습니다. 모금이 끝나고 이틀 뒤, 안타깝게도 백남기 농민께서는 영면하셨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20년 전 노수석 열사의 죽음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20년간 반성이 없었던 국가폭력은 또다시 국민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더 이상 이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故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기사원문: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2422 - 2016.10.9.


백남기 사건, 20년 전 故 노수석 때와 판박이


"경찰 과잉 진압으로 숨졌지만, 부검 결과 심장 마비"


1996년 김영삼 정권의 '대선 자금 공개'와 '등록금 동결' 요구 집회에 갔다가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한 고(故) 노수석(사망 당시 20세, 연세대학교 법학과 2학년) 씨도 부검 결과 '병사' 판정을 받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노수석 열사 추모 사업회'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1996년 4월 9일 작성한 노수석 열사의 부검 감정서를 9일 공개하고 "건강한 스무 살 청년에게 심장 질환을 덮어씌워 병사로 만든 부검"이라고 비판했다.


1996년 3월 29일 연세대학교 법학과 2학년이던 노수석 씨는 서울 종묘에서 열린 '등록금 인상 반대와 김영삼 대통령 대선 자금 공개 촉구 결의 대회'에 참여했다가, 최루탄과 곤봉으로 진압하던 경찰에 쫓겨 쓰러진 뒤 학생들에게 발견돼 을지로5가의 한 인쇄소로 옮겨졌다. 경찰의 진압 작전으로 구조 시간을 놓쳐 노 씨가 병원으로 이송됐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시민 사회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청년이 숨을 거뒀다고 비판했고, 유족의 동의를 받아 유족이 선임한 의료진과 변호사가 참관한 가운데 부검에 이르렀다. 부검 결과 고인의 등, 팔, 허벅지 등에서 구타에 의해 생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하출혈(멍)이 발견됐으나, 사인은 '외인사'가 아닌 '심근병증에 의한 급성 심장사(병사)'라고 나왔다.


당시 부검 참관인이었던 양길승 의학 박사는 "평소 건강하던 청년이 외부 충격이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이상 증세를 보여 사망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진압 과정에서 가해진 외부 충격이 심장에 영향을 줘 사망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유족들은 부검 결과를 비판하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법원에서 부검 결과를 채택하면서 패소했다. 고 노수석 씨는 숨진 지 7년 뒤인 2003년 9월에서야 '국가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 1996년 3월 29일 서울 종묘에서 열린 '등록금 인상 반대와 김영삼 대통령 대선 자금 공개 촉구 결의 대회' 당시 경찰이 참가자들을 진압하는 모습.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노수석 씨, '구타당했다' 호소했지만 병원 이송 지연" 


당시 노수석 씨 유족의 소송을 맡았던 이덕우 변호사는 1996년 당시 <한겨레> 기고를 통해 고인의 부검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노 씨의 오른쪽 등에는 가로 7센티미터, 세로 5센티미터의 피하출혈이 있었는데, 보통의 피하출혈이 아니고 근육 속 0.5센티미터 깊이까지 생긴 출혈이었다"면서 "이러한 상처는 방패 등의 흉기로 심하게 가격당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덕우 변호사는 또 부검 이후 목격자들의 증언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은 돌멩이 하나 던지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를 했는데도, 시위 시작 뒤 불과 5분 만에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쏘고 경찰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노 씨는 도망가면서 후배에게 '구타당했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한 인쇄소로 피신한 학생들은 노 씨가 경련을 일으키며 통증을 호소하자 팔다리를 주무르며 간호했는데, 전경과 사복 체포조가 들어와 그들을 구타하며 강제로 연행했다. 해당 인쇄소의 아주머니는 진압대장에게 노 씨가 위독하니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호소했으나 묵살당했다."


'노수석 열사 추모 사업회'는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하고 전년보다 16% 이상 오른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 집회에 참여한 20대 대학생이,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석연치 않은 부검 감정서로 인해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노수석 열사의 사건은 고 백남기 농민 사건과 유사하며, 이후 진행될 상황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노수석 아버지 "백남기 사태 보며 왜 부검 반대 못했을까 후회"


노수석 씨의 아버지 노봉구(74) 씨는 지난 9월 29일 <뉴스1>과 한 인터뷰에서 "백남기 농민 사태를 보면서 '왜 수석이 때 부검을 반대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에는 사인을 정확히 밝히려면 꼭 부검이 필요하다고 믿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된다"고 말했다. 


노봉구 씨는 "당시에는 백골단이 시위 진압을 하면서 곤봉으로 시위대를 두들겨 패고 최루탄을 쏟아부었는데, 그런 부분들은 부검 결과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심장이 멈춰서 죽었다고 사인이 나왔다"며 "모든 사람은 죽을 때 심장이 멈추는데 그게 사인이라는 게 황당하다"고 말했다. 노봉구 씨는 "수석이는 선천적 심장 질환으로 고생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몸을 많이 쓰는 풍물패를 열심히 했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렇기에 심장 마비라는 부검 결과가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노봉구 씨는 "백남기 씨는 물대포에 직접 맞는 영상이 있고, 그 충격으로 300일 넘게 식물 인간으로도 계셨다"며 "원인이 명백한데도 왜 경찰이 부검하려고 하는지 의문이다. 부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백남기씨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 1996년 3월 29일 노수석 씨의 주검을 국립의료원(현 국립중앙의료원) 의료진이 옮기고 있다.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 1996년 4월 3일 연세대학교 학생 등 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을 규탄하며 노수석 씨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