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경향신문] "20년전 노수석 열사 사망 사건은 고 백남기씨 사망과 판박이... 부검 결과로 판 뒤집으려는 국가의 의도 똑같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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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년전 노수석 열사 사망 사건은 고 백남기씨 사망과 판박이... 부검 결과로 판 뒤집으려는 국가의 의도 똑같아"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10. 10. 18:20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는 지난 9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쓰러지신 백남기 농민의 치료비를 모금했던 바 있습니다. 모금이 끝나고 이틀 뒤, 안타깝게도 백남기 농민께서는 영면하셨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20년 전 노수석 열사의 죽음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20년간 반성이 없었던 국가폭력은 또다시 국민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더 이상 이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故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기사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01653001&code=940100 - 2016.10.10.



"20년전 노수석 열사 사망 사건은 고 백남기씨 사망과 판박이... 부검 결과로 판 뒤집으려는 국가의 의도 똑같아"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1996년 고 노수석 군 폭력 살인 규탄 및 사인 규명을 위한 한총련 기자회견. 경향신문 자료사진


“부검 결과를 가지고 판을 뒤엎으려는 국가의 기획의도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부검 집행진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다는 게 핵심적인 문제다.”


10일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박병언 이사장은 고 백남기씨의 부검영장 집행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최근의 모습에서 1996년을 떠올렸다. 1996년 3월 29일, 당시 김영삼 정부에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5% 확보’를 요구하는 집회가 서울 종로 5가 인근에서 열렸다. 서울지역대학생총학생회연합이 주최하는 집회였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집회에 참가했던 박 이사장은 “총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었어서 그런지, 그날따라 경찰이 유난히 강경하게 진압을 시도했다”고 회고했다. 연세대 총학 투쟁국장도 “이렇게 진압하는 건 처음봤다”고 그에게 보고했던 날이었다. 박 이사장은 “보통은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집회가 해산됐다고 보고 더이상 쫓지를 않았는데, 그날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달려가는 학생들 뒤를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따라왔다”고 기억했다.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노수석 학생 역시 경찰 진압이 시작되자 집회 장소에서 물러나 몸을 피했다. 그는 학생들과 을지로 인근 대현문화사로 뛰어들었으나, 이곳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노수석 학생을 처음 발견한 대현문화사 대표 최종두씨는 “오후 6시 20분쯤 학생 2명이 진압경찰에 쫓겨 건물 안에 들어오기에 노군에게 기계 뒤에 숨어있으라고 했는데, 10여분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가보니 노군이 고개를 떨구고 침을 흘린채 움직이지 않아 119구조대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노수석 학생은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박병언 이사장은 “노수석 학생이 ‘나 맞았어’라고 말하며 몸을 떨어, 주변의 학생들이 팔을 주무르고 구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며 “구타와 전력질주에 의한 육체적 피로, 공포감이 겹쳤던 상황”이라고 전했다.



1996년 4월 고 노수석 군의 부검 결과를 발표하는 국과수 원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수사기관은 “외견상 상처가 없어 쇼크사로 보인다”며 부검을 해야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재야단체 등으로 구성된 대책위는 시신을 검안해 가슴과 명치 부근에서 멍자국을 발견했다. 경찰은 국립의료원 주변에 경찰 병력 1000여명을 배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고, 부검이 이뤄졌다.


부검 결과는 ‘병사’였다. 부검의들은 노수석 학생의 심장이 비대해 급성 심장사(심장병으로 사망함)가 왔다고 판단했다. 당시 부검감정서에 따르면 ‘급성 심장사란 해부학적인 심장의 병변 유무와 상관 없이 사망시간이나 양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급성 증상이 발생하여 1시간 내에 사망한 경우’를 뜻했다.


부검감정서에서 부검의들은 “심장을 제외하고는 각 실질장기에서 사인으로 고려할만한 특기할 질병을 보지 못하는 점. 본 변사자의 경우는 심장의 이상으로 인하여 급사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되는 바, 사인을 심근병증에 의한 급성 심장사로 판단함”이라고 밝혔다. 노수석 학생의 심장이 ‘비대하다’는 점이 심장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됐다.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에 따르면 당시에도 이같은 부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사가 있었다. “노군과 같이 평소 건강하게 지내던 청년이 외부 충격이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심장 이상 증세만으로 사망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가해진 외부적 충격이 심장에 영향을 주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었다. 또한 노씨는 풍물패 회원, 시위 선봉대로 활동했으며 평소 심장 이상 증세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3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열린 고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 논란에 대한 서울대병원-서울대 의대 합동 특별조사위원회 기자회견에서 백 씨의 주치의 였던 백선하 교수가 사망진단서 작성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김정근기자



하지만 이는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부검감정서의 결론을 받아들였고, 노씨의 유족은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최근 노수석 열사의 아버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부검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박병언 이사장은 “너무나 명백하게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부검을 하면 진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인이 뒤집어질까봐 부검을 반대한다기보단, 자식 손에 칼을 대기 싫다는 이유로 부검을 거리끼는 경향이 더 강했다. 아예 부검도 없이 시신을 빼앗아 화장해버리는 더 상황을 염려했다”고 덧붙였다. 박 이사장은 “시위 도중 사망한 경우에 대해 부검을 통해 그 의미를 번복한 최초의 사례일 것 같다”고 말했다.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고 백남기 농민 유가족과 법률대리인,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검경의부검 영장신청 재청구와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정지윤기자



박 이사장은 고 백남기씨의 유족에 국가가 “못할 짓을 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국가가 연명치료가 의미 없는 시점에서 고의적으로 백씨의 사망 시점을 지연시켰다. 물대포를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할 경우 폭발력이 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며 “백씨가 장기간 투병하며 물대포 살수에 의한 사망인지, 장기간의 합병증에 의한 사망인지 원인을 파악하기 힘들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합병증, 체질적 소인, 고령 등을 사망 원인으로 들며 ‘물대포는 사망 원인 중 하나일 뿐이다’ 식으로 축소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박 이사장은 “노수석 열사의 경우엔 외상이 적었으니 ‘한번 부검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백씨의 경우는 더 억울하다. (외상과 진료기록이 있기 때문에) 부검이 더 불필요하다”고 조심스레 밝혔다. 그는 “노수석 열사의 경우와 같은 역사적 경험을 돌아볼 때도 부검 과정에서 장난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부검은 안 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검이 정치적 판단의 도구로 쓰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장은 “부검은 의료행위가 아니라, 검사가 주재하는 수사다. 부검 집행진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다는 건 20년전 노수석 열사가 사망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