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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03 연세대 국문과 김영희 교수 - 연세대 항쟁 20주기 전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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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03 연세대 국문과 김영희 교수 - 연세대 항쟁 20주기 전시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9. 21. 13:58

추모사업회가 회원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는 회원 인터뷰, 세번째 순서는 연세대 국문과 김영희 교수(국문 92)입니다.


김영희 교수는 지난 8월부터 카페 마주에서 연세대 항쟁 20주기 기획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항쟁도 어느덧 20년이 흘렀습니다. 20년 전의 나, 20년 전 우리는 누구였을까요. 지금껏 이야기되지 못했던 1996년 8월 연세대에서의 그 날을 되짚어 봅니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블로그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방문 부탁드립니다.


블로그에서 보기: http://nosooseok.tistory.com/24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CQEiKQUpz4g


추모사업회 회원 인터뷰는 한 달마다 정기적으로 진행됩니다. 다음 인터뷰도 기대해주세요!


※ 인터뷰는 8월 29일 전시장소인 <카페 마주>에서 진행하였습니다.


10월 6일, 한겨레TV에서도 연세대 항쟁 20주기 전시를 기획한 김영희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영상 링크를 함께 첨부합니다. 추모사업회 인터뷰를 비롯하여 많은 시청 바랍니다. 보러가기





김영희 (국문 92,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는 1992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입학했구요. 지금은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활동 하고 있습니다.



Q: 어떤 계기로 연세대 항쟁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게 되셨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96년 8월에 연대에서 있었던 일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이후 대학 사회의 분위기라든지 학생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이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만 해도 그 수가 매우 많죠. 연세대 안에 있었던 학생들도 몇천명인데다 전경은 그보다 몇 배의 숫자가 있었죠. 학생, 전경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학교를 오가는 연세대학교 학생, 강사, 조교, 교수, 주변 시민.. 


그런데도 20년이 흐르도록 이 일은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된 적도, 조명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사건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자기의 경험이나 기억들을 굉장히 개인적인 일로만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일이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를 받으려면 서로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유하기 시작하면 각자 갖고 있는 개인적 경험이란 것도 말할 수 있게 되고, 그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사건에 대한 자기 해석도 달라지게 돼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사건을 갑자기 사회적 이슈로 빵 터뜨려서 크게 이야기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전시는 아주 작은 시도일 뿐입니다. 이런 작은 시도가 반복되고 겹쳐지면서 조금씩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고, 서로 공유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Q: 전시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지난 1학기 때 <구술과 서사>라는 수업을 처음 개설했어요. 수업 수강생들 중 한 조에서 96년 8월을 다뤘어요. 인터뷰한 결과를 보고 결심했죠. 이건 꼭 해야겠구나.


그런데 마침 제가 올해 우여곡절 끝에 협소주택(층별로 방 한 칸 크기로, 좁고 높게 짓는 주택)을 짓고 1층에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편집자 주: 카페 마주는 김영희 교수의 자택이기도 하다. 1층은 카페와 전시공간, 헌책방이고 2층 3층은 김영희 교수의 자택이다.) 저희 남편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항상 96년 8월에 대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카페 마주의 세 번째 전시는 연세대 항쟁을 주제로 꼭 8월에 맞춰 시작하자고 했죠.


<구술과 서사>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 중 뜻을 같이하는 학부생 두 명과 대학원생이 함께 준비했어요. 고생 많이했어요. 사진 붙이고 전시를 꾸미느라 며칠 밤샜나봐요. 자료를 선별하고, 새로 출력하고, 어떻게 붙일까, 내용 주제는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면서 오랜만에 밤을 샜죠. 오랜만에 밤새느라 피곤했지만 즐거웠습니다.



Q: 전시 컨셉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세 사람의 등장인물이 있는 스토리텔링이예요. 선배, 후배, 그리고 후배와 동기였던 당시 진압부대원. 이 세 사람의 대화와 편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전시 제목이 <20년만의 편지>잖아요. 20년만에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96년 8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묻고, 그 기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물론 세 사람의 구성에는 모두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인터뷰했던 내용을 넣은거죠.




Q: 교수님께서 기억하는 96년 8월은 어떠셨나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사회적이거나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많은 논의가 축적되어야 하는데요, 96년 8월은 한 번도 논의가 축적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서로 부르는 호칭도 다릅니다. 연대 항쟁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연대 사태라 하는 사람도 있죠. 저도 이 사건에 대해서 생각이 다 정리된 것은 아니라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얘기를 해보죠.


90년대 학생운동은 매우 큰 규모로 커져 있었어요. 1993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바뀌어요. 대표자 연석회의가 아니라 매우 대중적인 대중조직으로 탈바꿈한거죠. 학생회도 그만큼 활성화되어 있었어요. 제가 다녔던 국문과만 해도 농활에 80명씩 참가했고 웬만한 의제의 가두 시위에도 30~40명씩은 꼭 참여했으니까요. 한총련에서 출범식을 한다고 하면 정파를 떠나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을 했어요.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바뀐 후 열린 한총련 1기 출범식에서 발언중인 임수경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96년 당시 몇몇 큰 변화가 있었죠. 김영삼 정부는 연초부터 불법 대선자금 의혹에 시달렸습니다. 정권 차원에서 큰 압박으로 느꼈던건지 96년 당시 활동하던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압방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해요. 끝까지 토끼몰이식으로 진압을 한거죠. 그 과정에서 3월에 노수석 학생이 시위 도중 사망하는 일까지 있었고.


또한 이제는 문민정부고 5공의 잔재도 청산했기 때문에 최루탄 냄새 자욱한 시위는 더 이상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시기기도 했어요. 한총련 출범식에 도지사가 와서 축사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변화의 과정들 사이에 96년 8월의 그 사건이 있었던 거죠. 어떤 사람들은 96년에 여러 노림수가 있었다고도 표현합니다.


ⓒ 민중의소리


당시 한총련은 매년 한국사회 분단 극복과 통일을 중심으로 한 이슈로 범민족대회란 행사를 8.15일을 전후해서 진행했어요. 96년에는 연세대학교가 그 장소였고요. 그런데 경찰이 행사 시작도 전인 12일, 13일부터 아예 연세대 안으로 진입할 수 없게 원천봉쇄를 해버린 거예요.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그 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바깥에서 전경들이 에워싼 거죠. 예전에도 원천봉쇄가 있었지만 그 정도로 심하게 원천봉쇄를 한 적은 없었어요.


저도 그 때 졸업 후 동 대학원 조교 근무를 막 시작할 때여서 학교에 있었습니다. 학교 도서관 옥상 높이에서 헬기가 10대 가까이 계속 날고 있었어요. 헬기에서는 계속 형광색 물질이 든 최루액을 뿌려댔어요. 저도 그 때 이후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를 잘 듣지 못해요. 깜짝깜짝 놀라요. 원래 헬리콥터는 그렇게 낮은 높이에서 날면 위험하대요. 그런데도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아주 낮은 높이에서 날았기 때문에 학교 전체에 소리가 엄청나게 울렸어요.


연세대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최루액을 뿌리는 헬리콥터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그래서 주최측에서는 학교 안 상황이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범민족대회 행사를 마무리하고 빨리 해산하려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경찰이 해산하려는 학생들을 막았어요. 그래서 이 학생들이 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그 즈음에는 학생들도 전경들도 서로 싸움을 통해서 굉장히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고, 양 쪽에 굉장히 많은 부상이 있었죠.


나중에 대결 구도가 점점 심해지자 경찰은 학교 교문을 뜯어내고 페퍼포그(최루탄 다연발 발사기)를 교내에 진입시켰어요. 장갑차 들어오는 것처럼 백양로에 진입해서 종합관 앞에 바로 진을 쳤어요. 그 사이 참여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나가고, 나머지는 대략 7~8천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7~8천명의 사람들이 이과대학과 종합관(현재 교육과학관)으로 몰려 들어간 거예요. 원래 그 두 곳이 숙소였으니까 거기로 몰려들어간 거죠.


교문을 뚫고 진입하는 경찰


이과대는 실험실에 실험 물질들이 굉장히 많아서 거기는 경찰들도 함부로 건드릴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이과대는 서문 주택가와 바로 인접해 있어서 사실 완전 봉쇄를 하기도 어려웠죠. 그래서 나갈 수도 있고 물건 같은 것도 들여보낼 수 있는 상황이어서 상황이 좀 나았죠. 그리고 이과대는 이과대에서 사람들이 채 빠져나오기 전에 봉쇄된 거였어서, 같은 학과라든지 같은 단위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반면에 종합관은 (동문까지) 거의 다 나왔다가 동문에서부터 쫓겨 들어가서 이합집산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서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종합관은 무슨 실험실이나 실험 물질 때문에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필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건물에 들어간 이후에는 단전 단수가 되었어요. 전기, 수도 모두 끊긴거죠. 완전한 고립이었죠.




그 와중에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학생들의 폭력시위로 보도됐어요. 거의 9시 뉴스면 9시에 시작해서 9시 40분까지 40분동안 이 뉴스만 다룰 정도로, 거의 도심내 테러처럼 보도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20일에 경찰 특공대가 헬기에서 종합관 옥상으로 내리면서 진압에 들어갔어요. 밑에선 전경들이 들어갔고. 그래서 종합관은 전원 연행이 되었죠. 그 과정에서 옥상에서 던진 돌에 한 의경이 맞아서 사망한 일이 벌어졌고. 그 직후 이과대도 진압이 끝났죠. 연행자만 5천명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그러고는 몇 달 동안 증거보존처리를 위해 처참하게 무너진 종합관을 그대로 보존처리 했습니다. 그 명분으로도 전경들이 몇 달 동안 연세대학교 안에 상주했죠. 전경들과 학생들이 함께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어요. 


폐허가 된 연세대 교정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학교는 말할 것도 없이 초토화 되어있었죠. 온 교정에 탄피가 흩어져있고, 교문은 뜯겨져 있고 건물은 불에 타고. 학생들은 그 건물에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사물함에 있는 물건도 빼 올수가 없었고 학생회실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전경들이 학생회실과 사물함에 있는 학생들 물건도 가져가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죠.


어쨌든 이 사건 이후 97년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의 도덕적 정당성이 완전히 무너졌죠. 이로 인해 학생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잃었습니다. 96년 2학기 이후로 학생회에서는 모임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결정적으로 한총련이 불법 조직(이적단체)으로 규정이 되어서 한총련 대의원은 다 수배 대상이 되었죠. 요즘으로 치면 단과대 학생회 선거를 나와서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면 그날부터 집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학생들이 자신들의 학생 대중뿐 아니라 일반적인 시민들로부터 유리되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였는데, 외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내적인 요인도 있었죠. 학생운동 내부적으로도 그런 대중적 고립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자기 한계도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압 당시 불타는 종합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Q: 전시된 자료는 어떻게 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가 기증한 자료가 있었어요. 그걸 추모사업회의 협조를 받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찾아가 자료에 대해 전체적으로 검토를 했고, 그 중에 자료를 선별했습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진 연세대학교 기록보존소에서도 구할 수 있었어요. 거기 계신 선생님이 문과대 100주년 기념 전시할 때 모아놓은 게 있었거든요. 그것과 별개로 제가 개인적으로 모아놨던 자료들이 있어요. 다른 단과대 92학번의 친구도 사진하고 자료를 조금 가지고 있는 게 있었고요. 그런 자료들을 모아서 하게 됐죠.




Q: 자료 중에 날적이가 유독 많습니다. 날적이는 어떻게 구하게 되셨나요?

90년대 학번들은 처음 전시 들어온 사람들마다 다 날적이를 봐요. 날적이가 저희 세대에서는 되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모두 그 시절의 과 학생회실을 생각한다면 맨 처음에 떠올리는 게 대부분은 날적이일 거예요. 그 때는 우리가 뭐만 하면 날적이를 썼어요. 농활 가면 농활 날적이, 공활 가면 공활 날적이, 92년도 대통령 선거 때 공정선거 감시단에서도 공정선거 감시단 날적이. 저기 보면 당구 날적이도 있어요.


저는 날적이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많이 없어졌어요. 수소문 해봤는데도 잘 없더라고요.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날적이의 가치에 대해 생각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날적이를 가져갔더라고요. 이 날적이는 학생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 모아놓은 자료들을 저한테 위탁했고, 그걸 제가 보관하고 있던 거예요.





Q: 이 전시와 별개로 연세대 항쟁에 관련된 책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 경험들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묻고 살았어요. 여전히 쉽게 얘기하긴 어렵지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죠. 그리고 모두가 연세대 항쟁에 대해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부분들이 있는 거예요. 96년의 8월을 살았던 사람들은 제 뒤를 이어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고 후배들이잖아요. 그 부분이 저한테 책임감을 불러일으킨 측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전시와 별개로 제가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19~20명 정도 했어요.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 꼭 96년 8월만이 아니라 90년대를 다루는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책으로 낼 생각이에요. 한 권으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전시회를 준비하시면서 소회도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졸업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되었지만, 제 마음에서 ‘나 이제 진짜 학교를 졸업했나보다’, 이런 정서적인 것들도 10년 정도 지났을 때쯤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꼈어요. ‘나 이제 진짜 졸업하려고 이거 하는구나.’


생각보다 인터뷰하면서도,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제가 굉장히 쿨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쿨하지 않았고요. 인터뷰 할 때마다 굉장히 마음이 힘들었어요.


준비하는 내내 제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는 마음이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96년 8월에 어떤 식으로든지 의미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전시가 그저 선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추모사업회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시간이 되면 전시는 한 번씩 보러 오셨으면 좋겠어요. 받는 사람이 원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이 준비한 사람들의 마음은 선물이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니 즐겁게, 마음 따뜻하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도 느꼈는데요, 추모사업회의 존재를 알고 수석이와 연세대 항쟁을 기억하면서도 추모사업회에 다가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 부분은 같이 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96년 8월에 대해서도 우리가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있나? 각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어본 적이 있을까? 생각에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차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모두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들을 수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추모사업회로 주저하지 않고 모여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연세대 항쟁 20주기 기획전시 <20년만의 편지>


장소: 카페 마주 (서대문구 남가좌동 가재울로2안길 29-14)


시간: 월~일 오전 10시~오후 10시


전시기간: ~2016년 9월 30일까지

(전시기간이 10월 30일까지로 연장되었습니다. 10월 30일까지 정상적으로 관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