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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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노수석/그의 죽음 이후

9. 진상규명·책임자처벌·명예회복을 위한 법정투쟁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3. 29. 00:40

※ 노수석 열사의 장례투쟁을 마치고 곧이어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출발이 되었던 고발과 민사소송과정을 정리합니다.


1. 고발

1996년 4월부터 연세대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 서울지방검찰청에 서울지방경찰청장 등을 고발하였고 검찰은 무혐의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항고하였으나 1997년 1월 서울고등검찰청은 혐의가 없다며 항고를 기각하였다. 

종전 이한열, 강경대 열사 사건 등과 같이 경찰 가해자가 명백히 드러난 경우 외에는 처벌한 예가 없으므로 더 이상 검찰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해 대검찰청에 재항고를 포기하고 민사소송에서 진실을 밝히기로 하였다.


2. 민사소송 제기 

1) 1심 (원심) 

1998년 2월 13일 국가를 상대로 유가족이 이덕우 변호사를 대리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경찰관직무집행법 등을 어기고 토끼몰이식 과잉진압을 해 노수석 열사가 사망했으므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월 3일 검찰 수사기록에 대한 인증등본촉탁신청을 하고 수사기록을 입수, 검토하여 5월 8일 수사기록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그 이후 노수석 열사가 사망할 당시 같은 장소에 있었던 대학생들인 남기돈, 임이택, 감종민(이상 연세대 법학과) 등의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였고 법정에서 하민성(연세대 사회학과), 김건극(한양대)의 증언이 있었다. 

1999년 1월 15일 원고 청구 기각 판결이 선고되었다. 판결 내용은 과잉진압에 대한 원고 측 증인들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고 과잉진압을 인정할 증거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부검 결과 밝혀진 상처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므로 사망원인으로 볼 수 없고, 경찰이 구호 요청을 무시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부족하며 즉시 구호 조치를 했다 하더라도 생존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2) 2심 (항소심)

1심 판결에 대하여 항소하여 경찰의 폭력과 과잉진압에 대하여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한양대 학생인 정의진, 차동호 등의 증언을 들었고 부검에 관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서중석 과장의 증언을 들었다. 

이 때 서중석 과장은 “심근병증이 있다 하더라도 비를 맞아 체온이 내려가고 극심한 공포상태에서 전력 질주하였다면 그것이 심근경색(심장마비)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의사로서의 소견을 밝혔다. 

이는 안전한 해산 유도가 아니라 검거를 위한 토끼몰이식 과잉진압 과정에서 경찰봉과 방패 등의 폭력을 사용했다면 당연히 사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위와 같은 증언이 나오자 법원에서는 화해를 권고하였으나 국가가 거부하였다. 

2000년 3월 14일 항소에 대한 기각판결이 내려졌다. 노수석 열사가 불법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점과 사망의 직접 원인이 될만한 구체적인 외상이 없고 가해자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재해 등에서는 심장병이나 고혈압 등의 질병이 있다 하여도 과로로 사망한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것이 확립된 판례이다. 그리고 불법집회라 하더라도 경찰관 직무집행법은 준수되어야 한다. 즉 불법집회라고 해서 잔인한 폭력이나 토끼몰이식 과잉진압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노수석 열사의 경우 만약 심근병증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따라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없었다면 건강하게 생활하였을 것이므로 항소심 판결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3) 3심 상고(법률심)

위 항소심 판결에 대하여 곧 상고를 하였다. 상고심인 대법원은 사실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법률심으로서 법령적용에 잘못이 없는지를 판단한다.

항소심과 1심에서 산업재해 등의 판례와 배치되는 판단을 한 것은 위법하다는 점, 명백한 경찰 폭력과 과잉진압에 대한 증거가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증거법칙을 위배한 것이라는 점, 사망과 과잉진압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점 역시 중요한 법령적용의 오류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2000년 6월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1, 2심 판결을 유지하였다. 


3. 고발과 민사소송 제도의 한계

검찰에 고발하거나 법원에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은 모두 국가의 기존체제라는 한계를 갖는다.따라서 노수석 열사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서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여 반론의 여지가 없도록 하지 않는 한 체제내적이고 보수적인 검찰과 법원에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시위현장에서의 사망이 아닌 경우 법원의 판결은 보수적이 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사건 발생 직후 학생들이 ‘대선자금 공개’를 들고 나와 상부에서 강경진압을 지시하였다’고 제보를 한 기동대 중대장을 끝까지 찾아내 파헤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수석 열사가 피신한 장소가 시위 장소의 연장이라는 점, 기왕증(旣往症)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경찰의 폭력과 과잉진압이 없었다면 평소 격렬한 운동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던 노수석 열사가 사망에 이르렀을까 하는 점 등을 생각하면 이 사건 판결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많다. 

그 후 명예회복법이라는 특별법에 의하여 노수석 열사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신장하고 민주화에 기여하였다는 점이 인정되었으나 사법부의 판결은 연구와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글/ 이덕우 변호사

열사 사망 직후 대책위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인연을 맺어 재판 투쟁과 명예회복투쟁에도 함께 해주셨다.



참고문헌: <노수석 백서 -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2005,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