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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사의 대학시절 흔적 - 노수석의 날적이 본문

청년 노수석/노수석의 삶

2. 열사의 대학시절 흔적 - 노수석의 날적이

노수석추모사업회 2016. 3. 28. 18:18

※ 이 글은 열사가 활동했던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풍물패 '천둥'의 날적이에 남긴 글입니다. '똑해'는 천둥에서 지은 열사의 패명입니다.


주말에 집에 다녀왔다. 

부모님은 잘 계셨고 동생도 잘 생활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아주 어리게 보이나 보다. 내년에 군대에 가겠다고 하니까 걱정하는 모습이셨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너무 어리게 행동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큰데 지금 나의 모습을 보면 너무 한심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한다고 한다. 평소 별 생각 없이 살아온 내가 과연 선거운동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많은 생각을 하려고 한다.

1995년 11월 6일 월요일 똑해 


방금 글터 일일호프에 다녀왔다. 돈은 별로 내지도 않고 먹기만 했다.

7시부터 민주노총 전야제를 한다고 한다. 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가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학교에 올 이유가 없었는데 천둥방 생각이 나서 학교에 들렀다. 

1학기 때는 천둥에 적응이 안 되었는데 지금은 천둥人이 돼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나를 볼 때 다른 천둥人들을 보기가 부끄러울 때도 많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고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할 일 없을 때는 놀고 고민이라고는 성적 떨어졌을 때 고작 해보았던 것 같다. 물론 몸이 피곤할 때는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나의 문제점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해 보았고 괴롭기도 하다. 항상 웃고 다니고 긍정적, 낙관적으로 살았던 나의 모습을 되찾고 싶다. 나 이외의 세상의 다른 문제들에 좀더 진지해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힘이 든다.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 굳어진 나의 성격, 생활자세를 바꾸기가. 나라는 인간이 이러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맴도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기 힘들다.

그래. 좀 더 적극적으로 살자. 세상의 많은 일들을 의의 있는 것으로 보도록 노력하자. 다른 사람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자.

뒷날 변화된 나의 모습으로 지금의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이런, 나와 어울리지 않는 넋두리를 쓰고 있는 내가 정말 이상하다.

1995년 11월 11일 토요일 노


지금 8:45 AM이다. 8시 35분에 천둥방에 도착했다. 아침 찬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학교에 오니 참 기분이 좋구나. 아침에 일어날 때는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빨리 나오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천둥방에 고독을 씹으며 앉아 있으면 정말 편하다.

어제 수능 시험일이었다고 한다. 불과 1년 전을 떠올려보면 감회가 새로워진다. 매일 새벽에 집을 나와 12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했는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별로 힘들지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활은 어떻지?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 생활을 반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대학이라는 곳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결코 별로 좋은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주 널널한 놈이 되어 버렸다. 하루 빨리 이 널널한 생활을 청산하도록 노력해야겠다.

1995년 11월 23일 목요일 똑해


드디어 첫 시험을 보았다.

망했다.

1995년 12월 15일 금요일 똑해


요새 왠지 기분이 좋다. 공부도 잘 된다. 분명히 시험을 잘 볼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천둥 사람들의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다. 누구나 복잡한 고민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방금 영어 해석을 했는데 What is happiness?(맞나?)라는 단원이었다. 

거기에서 Happiness는 difficulty에 있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공감이 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참 괴롭다. 그러나 아무런 어려운 규칙이 없는 게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듯이 어려움 없는 인생도 무미건조할 것이다.

1995년 12월 17일 일요일 

그냥 기분 좋은 똑해


오늘 재학증명서를 하러 학교에 왔다.

며칠 만에 천둥방에 들렀다. 아무도 없는 천둥방이 너무 깨끗하다. 그런데 기분이 썰렁하다.

어제는 광주에서 친구가 특차 원서를 내러 올라왔다. 고등학교 친구들 몇몇과 술을 마구 마셨다. 역시 고등학교 친구들은 참 편하다. 

물론 대학 와서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오늘이 12월 27일인가 보다. 특차원서 내러 올라온 친구를 보니 작년의 내가 생각났다. 나도 이맘때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연대 법대에 특차원서를 냈는데 낙방하고 결국 본고사 보고 들어왔다.

벌써 1년이 다 지나가는구나. 1년 동안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래서 정말 후회스럽다. 입학할 당시 선배들의 충고가 정말 많았다. 아마 나와 같은 1학년 생활을 거쳤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96년이 된다. 새해에 대한 기대감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냥 가슴이 허전할 뿐이다.

내일 집에 내려가려 한다. 아마 1월 중에 서울에 올라올 것이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한 1달 정도 집에서 푹 쉬고 싶기도 하다. 내년에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천둥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아, 방금 올라오면서 영진이 형, 윤섭이 형, 은현이, 영진이를 만났다. 같이 술 한 잔 했으면 좋겠지만 지금 몸이 말이 아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술 한 잔 해야겠다.

1995년 12월 27일 수요일 

똑해 


내일 또 집에 간다.

전수 갔다 온 뒤로 두스형 생일이 있었는데 못 갔다. 죄송해요.

전수는 힘들었다. 그러나 갔다 오니까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천둥 95학번 중 나 혼자만 가게 된 점이 참 아쉽다.

성적 때문에 남도 학숙에서 짤렸다. 하숙해야 될 텐데 걱정이다. 등록금도 인상되는데 부모님한테 죄송하다.

집에 가서 책이나 열심히 읽어야겠다. 집에서 쉬는 동안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반성도 하며 보람 있게 보내야겠다.

그럼 안녕히, 다음에 또 봅시다.

- 1996년 1월 30일 화요일 노


오늘 후배 1명이 들어왔다. 기쁘다.

현수는 나같이 그러지 말고 천둥생활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근데 왜 천둥에 후배들이 잘 안 올까? 곧 들어오겠지 뭐.

요새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 죽겠다. 단순한 내 체질에 안 맞는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다. 

종민이형 말대로 빨리 나의 가치관을 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심하다.

- 1996년 3월 5일 화요일 똑해


지금은 PM 8:50이다.

내일 10:00에 형총 시험 본다.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

아래서 술 마시다 책을 안 가져와 올라왔는데 공법실에서 또 술판이 벌어져서 또 마셨다.

오늘 밤을 새야겠다. 

머리가 어지러워 공부가 될지 모르겠다.

나는 위기에 강하니까 어떻게 되겠지 뭐.

- 1996년 3월 26일


대동제 개막식을 알리는 풍물놀이에 함께 했던 열사 (왼쪽에서 두 번째)



참고문헌: <노수석 백서 -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2005,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